일터예배 제3기 (영상예배) - 방역 (총배덕 목사 (20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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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울 작성일 21-02-02 11:12 조회 756 댓글 0본문
(로마서 7:21-25)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성을 설명합니다. 율법을 통해 죄의 본질과 속성을 들춰내는 역할을 합니다. 결코 율법이 구원의 완성이 되지는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므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악이 함께 있다는 법칙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지체 속에서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으로 사로잡는다고 합니다. 정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천적으로 전염병을 차단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쉬운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사회적거리두기로 방역 지침을 만들어 방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염병을 방역하듯 우리의 영도 방역을 해야 합니다. 정죄의 생각을 방역해야 합니다. 또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마음을 차단해야합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법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결코 우리의 선한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한 행위가 구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착각에 빠지게도 합니다.
우리는 실수할 수 있고 오류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단들의 접근 방식은 우리 말의 오류나 생각의 오류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유월절을 지키라고 했는데 오늘날 교회는 왜 지키지 않는가? 와 12월 25일은 예수 탄생일이 아니다 라는 말들로 논리적 오류를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 궁금하게 하고 마치 교회에 속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합니다. 이런 이단 사상도 우리는 방역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유월절대신 부활절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절기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기념하는 것입니다. 핵심가치도 아닌 것을 중요하게 다루는 말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소리와 정죄의 소리들이 들려 올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과 믿음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터진 IM선교회 사태를 통해 여러 성도 분들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원망하시는 분, 하소연하시는 분, 개종하시겠다는 분, 등. 정말 문제가 무엇일까? 교회가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지탄을 받는 것이 문제일까요? 여러 소리들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문제일까요?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1995년 심리학자 클로드 스틸 이라는 사람이 특별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너는 공부를 못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신호와 스스로 못한다는 신호까지 차단 해 버리자 성적이 상위권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을 차단의 효과라고 합니다. 스스로 믿음이 약하다는 신호를 차단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과거의 실수와 과거의 죄 즉 정죄의 소리도 차단해야 합니다. 부정적 생각이 들게하는 소리도 차단하셔야합니다. 그러지 않고 실패의 소리의 마음을 빼앗기면 결국 ‘난 어차피 실패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우리를 망치게 합니다. 정죄의 소리에 빠지게 되면 ‘그래 어차피 죄를 지었는데..’라며 죄의 방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도 차단이 필요하듯 신앙생활을 하기위해서도 차단이 필요합니다.
‘공적자아실현과 사적자아실현’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사적이라는 말보다 공적이라는 말을 더 긍정적이게 평가를 합니다. 보통 일중독자 성향의 분들이 공적자아가 굉장히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적자아는 미성숙하다고 합니다. 사적자아가 미성숙한 상태에 공적자아성취만을 위해서 에너지를 사용하다보면 번아웃 되어진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사적자아실현에도 시간을 투자하라고 추천을 합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 혼자만의 공간...
예수님도 그런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무리에서 나와 홀로 기도하시고, 광야로 가시고, 이런 과정을 통해 공생애를 살아낼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 받았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공적 믿음이 있고 사적 믿음이 있습니다. 사적인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평상시 공적 믿음과 사적 믿음의 균형이 조화롭게 잘 맞았던 분들은 코로나 시기 오히려 사적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을 공급 받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성경공부나 여러 목사님들의 말씀과 세미나를 통해 영적성장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반면 사적 믿음이 미성숙한 상태에 계신 신앙인들은 오히려 교회에 출석을 못하는 것에 공포심마저 생긴다고 합니다. 화면으로 말씀을 듣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자기 믿음이 약해지는 것 같다는 말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교회에서 너무 공적인 믿음만 키워왔는지 모릅니다. 각종예배 각종봉사..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믿음을 키우는 행위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코로나 시기 공적으로 사적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같습니다.
(로마서 8: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을 방역과 차단으로 해방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 ‘불쌍히’ 나 ‘긍휼히’라는 말은 영어로 ‘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com'은 함께라는 의미가 있고, ‘passion’은 ‘열정’이라는 단어이지만 ‘고통’이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불쌍히’ 또는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하는 의미는 ‘나의 고통에 함께하소서’ 라는 의미가 되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에 ‘compassion'하셨듯이 다른 이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 생각하여 예수님처럼 ‘compassion'의 자세를 가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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