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예배 3기(온라인 줌예배) - 다 행한 후에 (2021.9.25 총배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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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울 작성일 21-10-07 07:04 조회 479 댓글 0본문
다 행한 후에
(누가복음 17:7-10)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종은 아무리 힘들게 밖에서 일하고 들어왔다고 할지라도 주인은 그 종에게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거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종은 그 주인에게 불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종이니까 당연히 순종해야 합니다. 의심해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한대로 하였다고해서 종에게 주인이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종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렇죠. 감사를 받기보다 주인의 인정을 받기보다 당연히 할 일 종으로서 마땅한 일이 되는 것인데... 요즘 우리는 그렇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신앙생활로 줄세우기를 하는거 같고, 누가누가 더 잘하나 비교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경건파였습니다. 그들의 중심은 율법주의입니다.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결국은 보이기 위한 경건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반대적으로 사두개파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이 아닌 정치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비록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종교, 관습, 생활 등을 보장을 받았고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분봉왕 제도로 어느 정도의 주권을 보장하였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불만은 로마에 세금을 낸다는 것 외에는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도 문제가 없었기에 그 어느 때 보다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종교적 타락의 시대였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시대.. 마치 오늘날의 시대를 보는 듯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경제적으로 그 어느때보다도 풍요로운 시대을 맞이 하였고
문화적으로 환경적으로 교육적으로 부족함 없이 편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지적이다보니 신앙도 지적 구원에 빠져있는 듯 합니다. 많이 알아야 구원을 받는 듯 생각이 들 정도로 비판적 사고가 팽배합니다.
서로 누가 더 뛰어난지를 경쟁을 하듯 타 목사의 설교와 교회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헐뜯고 비방하는 것이 자신을 더 돋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싸우는 듯 합니다. 정치적으로 갈라진 교회와 목회자, 신학적으로 갈라진 교회와 목회자...
갈라질대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의”를 드러내는것이 더 빠른 시대..
누가 가장 큰 피해를 겪을까요?.. 현 성도들과 예비성도들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종인데.. 누가 더 잘했는지 못했는지 비교한들 뭐합니까? 우리는 모두 무익한 종입니다.
신앙은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정진인 것입니다. 나의 믿음에 대한 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 베들레헴 침례교회 존파이퍼 목사님이 전립선 암으로 수술을 받았는데요. 그분이 블로그에 글을 남기셨는데.. 당신의 암을 허비하지 말라 라고 썼습니다.
암을 수술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깊어지지 않는다라면 암을 허비하는 것이랍니다.
다른 말로 우리 삶에 고난의 문제가 왔어요. 그 고난을 허비하지 말라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시련이 왔어요. 그 시련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안좋다라고 여기는 것조차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난을 한다면 그것은 허비하는 것이겠죠.
오히려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그 안에서 믿음으로 세워지는 것 그것이 오히려 우리한테 필요한 것 아닐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더 깊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존파이퍼목사님은 모두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암 조차도 허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암에 대해서만 그럴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환경, 돈, 건강, 인간관계, 이 모든 것들, 우리의 생명까지도 우리가 다 허비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남을 비판하고 비난할 새가 어디 있습니까?
내 교만을 돌아보기도 바쁜데 남의 교만을 잴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내 삶에서 그런 일들로 왜 허비를 합니까? 오히려 유익한 것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유익한 것을 위해서 거룩한 허비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허비하고 낭비해야 되지 않을까요?
최근에 “선한영향력가게” 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일반 자영업하시는 분들이 남을 돕기 위해 가입을 하고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처음 시작은 마포에 있는 스파게티집에 급식카드를 들고온 학생들에게 카드만 보여주면 스파게티를 제공해주는 미담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이것이 알려져서 돈쭐이 난 가게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선한영향력가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이왕 이렇게 된거 이일을 하자
“지역마다 밥 먹기 어려운 아이들을 먹이자”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일에 거룩한 허비를 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왜 우리의 생각과 열정을 남을 깎아내리고 비판하는 것에 허비를 합니까?
우리는 교회만 출석하면 다 이루어진 줄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 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고 이제 시작인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이 아직 남았는데... 우리는 삶에서 다 이룬것처럼 “나는 교회 다니니까 땡끝” .
“나는 구원의 확신도 있고 주마다 봉사도 했으니까. 땡끝.”
아무리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한다 해도 말씀의 한 구절이라도 살아내지 못한다라면 그게 무슨 소용있겠습니까?
좋은 말씀이 많지만... 우리가 삶에서 말씀 한절이라도 살아낸다고 한다면 그게 진짜 신앙이고 성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지식이 있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랑거리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말씀대로 살아내려하지 않을까요?
교회나왔다고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밭을 열심히 갈고 왔으니까 배고프니까 밥먹어야지 했는데....
띠를 띠고 수종들어라 내 먹을 것을 준비해와서 수종들어! 라고 한다면 이런것이 우리의 여정이고 과정인 것 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불평하고 불만할 수 있을까요? 우리 각자 부르심이 다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다릅니다.
사는 집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고, 생긴 것이 다르듯이,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다른데 왜 우리가 사이즈를 비교해서 마음에 분을 품어야 하는 것인가요?
생각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하물며 종교가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누군가를 헐뜯고 폄하하고 깎아내릴 수 있는 신분이 아닙니다.
신앙를 갖게 된 순간 우리는 전부 무익한 종이고 나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주인을 드러내는 일이기에
말 한마디 행동하나 시선하나 손길하나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우리가 늘상 이야기하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알고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누가복음 17:7-10)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종은 아무리 힘들게 밖에서 일하고 들어왔다고 할지라도 주인은 그 종에게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거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종은 그 주인에게 불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종이니까 당연히 순종해야 합니다. 의심해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한대로 하였다고해서 종에게 주인이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종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렇죠. 감사를 받기보다 주인의 인정을 받기보다 당연히 할 일 종으로서 마땅한 일이 되는 것인데... 요즘 우리는 그렇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신앙생활로 줄세우기를 하는거 같고, 누가누가 더 잘하나 비교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경건파였습니다. 그들의 중심은 율법주의입니다.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결국은 보이기 위한 경건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반대적으로 사두개파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이 아닌 정치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비록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종교, 관습, 생활 등을 보장을 받았고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분봉왕 제도로 어느 정도의 주권을 보장하였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불만은 로마에 세금을 낸다는 것 외에는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도 문제가 없었기에 그 어느 때 보다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종교적 타락의 시대였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시대.. 마치 오늘날의 시대를 보는 듯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경제적으로 그 어느때보다도 풍요로운 시대을 맞이 하였고
문화적으로 환경적으로 교육적으로 부족함 없이 편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지적이다보니 신앙도 지적 구원에 빠져있는 듯 합니다. 많이 알아야 구원을 받는 듯 생각이 들 정도로 비판적 사고가 팽배합니다.
서로 누가 더 뛰어난지를 경쟁을 하듯 타 목사의 설교와 교회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헐뜯고 비방하는 것이 자신을 더 돋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싸우는 듯 합니다. 정치적으로 갈라진 교회와 목회자, 신학적으로 갈라진 교회와 목회자...
갈라질대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의”를 드러내는것이 더 빠른 시대..
누가 가장 큰 피해를 겪을까요?.. 현 성도들과 예비성도들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종인데.. 누가 더 잘했는지 못했는지 비교한들 뭐합니까? 우리는 모두 무익한 종입니다.
신앙은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정진인 것입니다. 나의 믿음에 대한 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 베들레헴 침례교회 존파이퍼 목사님이 전립선 암으로 수술을 받았는데요. 그분이 블로그에 글을 남기셨는데.. 당신의 암을 허비하지 말라 라고 썼습니다.
암을 수술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깊어지지 않는다라면 암을 허비하는 것이랍니다.
다른 말로 우리 삶에 고난의 문제가 왔어요. 그 고난을 허비하지 말라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시련이 왔어요. 그 시련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안좋다라고 여기는 것조차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난을 한다면 그것은 허비하는 것이겠죠.
오히려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그 안에서 믿음으로 세워지는 것 그것이 오히려 우리한테 필요한 것 아닐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더 깊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존파이퍼목사님은 모두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암 조차도 허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암에 대해서만 그럴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환경, 돈, 건강, 인간관계, 이 모든 것들, 우리의 생명까지도 우리가 다 허비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남을 비판하고 비난할 새가 어디 있습니까?
내 교만을 돌아보기도 바쁜데 남의 교만을 잴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내 삶에서 그런 일들로 왜 허비를 합니까? 오히려 유익한 것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유익한 것을 위해서 거룩한 허비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허비하고 낭비해야 되지 않을까요?
최근에 “선한영향력가게” 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일반 자영업하시는 분들이 남을 돕기 위해 가입을 하고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처음 시작은 마포에 있는 스파게티집에 급식카드를 들고온 학생들에게 카드만 보여주면 스파게티를 제공해주는 미담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이것이 알려져서 돈쭐이 난 가게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선한영향력가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이왕 이렇게 된거 이일을 하자
“지역마다 밥 먹기 어려운 아이들을 먹이자”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일에 거룩한 허비를 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왜 우리의 생각과 열정을 남을 깎아내리고 비판하는 것에 허비를 합니까?
우리는 교회만 출석하면 다 이루어진 줄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 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고 이제 시작인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이 아직 남았는데... 우리는 삶에서 다 이룬것처럼 “나는 교회 다니니까 땡끝” .
“나는 구원의 확신도 있고 주마다 봉사도 했으니까. 땡끝.”
아무리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한다 해도 말씀의 한 구절이라도 살아내지 못한다라면 그게 무슨 소용있겠습니까?
좋은 말씀이 많지만... 우리가 삶에서 말씀 한절이라도 살아낸다고 한다면 그게 진짜 신앙이고 성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지식이 있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랑거리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말씀대로 살아내려하지 않을까요?
교회나왔다고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밭을 열심히 갈고 왔으니까 배고프니까 밥먹어야지 했는데....
띠를 띠고 수종들어라 내 먹을 것을 준비해와서 수종들어! 라고 한다면 이런것이 우리의 여정이고 과정인 것 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불평하고 불만할 수 있을까요? 우리 각자 부르심이 다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다릅니다.
사는 집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고, 생긴 것이 다르듯이,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다른데 왜 우리가 사이즈를 비교해서 마음에 분을 품어야 하는 것인가요?
생각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하물며 종교가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누군가를 헐뜯고 폄하하고 깎아내릴 수 있는 신분이 아닙니다.
신앙를 갖게 된 순간 우리는 전부 무익한 종이고 나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주인을 드러내는 일이기에
말 한마디 행동하나 시선하나 손길하나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우리가 늘상 이야기하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알고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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