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교회 기적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
본문
성경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달라하여 집을 나간 둘째 아들과 매일같이 동구 밖에 서서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아들은 호랑방탕하게 살며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한 후 주리고 주리다가 돼지 냄새 거지꼴로 아버지의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안아주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까지 열어줍니다.
최근 목사님께서 믿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라는 넓은 길과 <생명>으로 이어진 좁은 길 그 사이 경계선에 머물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 “ 이라셨지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부류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아멘 한 사람들입니다.
이 놀라운 고백의 시간이 기적처럼 일어났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거기서 머무는,
경계선 이쪽 <생명> 쪽에서 울타리에 두 발을 올려 놓은 채
세상을 향해 몸을 쑥 내밀고는 두리번 거리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다른 한 부류는 아직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직은 선뜻 울타리를 넘을 용기를 내지 못하지만
경계선 저쪽 <세상> 쪽에서 울타리에 두 발을 올려 놓은 채,
<생명>의 길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 쪽으로 몸을 쑥 내밀고 두리번 거리는 사람들이지요.
집 나간 둘째 아들도,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던 첫째 아들도
모두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 경계선에 서서 세상을 힐끔거리는 사람들 “ 일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세상 사람들이 “ 경계선에 서서 생명 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갑자기 제 마음에 들어옵니다.
경계선 어디에 서 있었든지 상관없이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과 시선을 맞추는 순간
머뭇거린 시간이 얼마나 오래 되었든 지에 상관없이
얼마 만에 예배에 나왔든지, 얼마 만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든지 상관없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늘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저를 뜨겁게 합니다.
작은 목회라 불리는 다락방,
그곳을 맡고 있는 순장들의 순원들을 향한 마음이 이를 닮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아무리 오래다 할지라도
아직도, 아니 앞으로도 계속 그 경계선에 버티고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순원이라 해도
순장들의 시선은 언제나 그들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가끔 하나님을 향해 고개 돌릴 때, 변함없이 따뜻한 눈 빛으로 그 눈과 마주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경계선에 서 있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가끔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늘 이쪽을 보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울타리를 넘기 위해 무거운 발을 들거나 몸을 기울이는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우리는 그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늘 우리들을 보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짧고 강렬한 임팩트가 아니라
긴 호흡입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다 보면
그들은 결국 용기를 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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