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예배 제2기 (영상예배) - AQ를 키워라 (총배덕 목사 (20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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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울 작성일 20-10-05 18:39 조회 11,813 댓글 0본문
( AQ를 키워라 )
말씀: 로마서 5:1-4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어려서 보았던 ‘전설의 고향’에 나왔던 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대가 집에서 며느리를 선발하기위해 내놓은 조건이 있었습니다. 며느리 후보는 심부름을 할 몸종과 단 둘이 작은 집에서 한 달간 살아내기만 하면 며느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단 3일치 식량을 가지고 두 사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각자 여러 방법들을 사용하여 버티기를 하였습니다. 3일치 쌀을 한줌씩 30개로 나누거나, 3일에 한 끼를 먹고 버티려는 이와, 몰래 가족들을 통해 음식을 가져오게 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버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다 평범한 한 아가씨가 후보로 왔는데 다른 이들과는 달리 버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상적으로 밥을 지어먹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3일만 버티러 왔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일이 지나고 4일이 되는 날부터 몸종에게 나가서 이웃의 바느질 꺼리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음식이나 돈을 받고 바느질을 하므로 오히려 쌀독에 쌀이 늘어났습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30일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시험을 통과하여 며느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IQ 와 EQ 얘기는 들어 보셨을 겁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 내려면 AQ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위 이야기에 아가씨는 AQ가 높았던 거 같습니다.
AQ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1. 역경지수 AQ(Adversity Quotient)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1997년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Paul G. Stoltz)가 만든 용어, 역경지수가 높을수록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의지와 위험을 긍정적으로 감수하고자 하는 낙관주의가 확립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2. 적응지수 AQ(Adaptability Quotient)
변화하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적응지수의 핵심은 Control(통제), Ownership(소유권), Reach(도달), Endurance(지구력) 이렇게 네 가지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도 이렇게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정의를 내리고 노력하여 훈련을 합니다. 하물며 믿음이 있는 우리가 이보다 못하면 말이 안 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에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코로나로 삶의 모든 부분이 흔들리고 어렵습니다. 불편함이 넘칩니다. 이럴 때 우리 믿는 이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물론 로마서 5장은 오늘날 우리가 격고 있는 삶의 환난이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다가올 환난과 핍박에 대한 격려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세상은 버티지만 우리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렇습니다.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비록 코로나로 어렵지만 날마다의 삶을 지속하는 겁니다.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날마다 죽음이 드리운 시간을 보내며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갈 때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내를 사랑하던 그 사랑의 마음으로 함께 수용되어 공포에 떨고 있는 이들을 돕고 위로하는 삶을 살아냅니다. 사랑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현재 교회가 세상을 향해 취하는 자세나 행위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을 겁니다. 그래도 제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저는 비대면 온라인 예배가 맞다 싶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겪고 있는 환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먼저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대면 예배를 지키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 되겠지만, 대면이던 비대면이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섬김과 배려의 문제입니다. 어느 권사님께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니 믿음이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래서 떨어진다면 그것은 믿음일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분위기에 감정이 고조 된 것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구약 유대인들은 제사중심의 신앙을 이어왔습니다. 성전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포로기 시대에 유대인들은 믿음을 어떻게 지켰을까요? 성전이 없는데?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디아스포라 라고 합니다. 성전이 없어졌다고 예배가 멈추거나 신앙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서나 말씀을 나눌 수 있고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신구약 중간시대를 거쳐 율법적, 지적, 영적으로 가장 융성한 시대 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복음을 듣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이 만든 제도와 법도 그리고 규례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예수님이 누가 저들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비록 모이지 못해도 이렇게 온라인으로 함께 예배할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이웃을 위해 불편을 감수 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 아닐까요?
일터와 가정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우리의 현재 삶은 코로나로 힘들고 지치고 어렵지만 즐거워해야 합니다. 억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AQ를 키워 유연하게 현재를 살아내는 일터지기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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