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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예배 제 3기 (온라인 줌 예배) - 우리는 누구? (총배덕 목사(202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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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울 작성일 21-04-02 12:56 조회 57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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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

말씀: 이사야 44:1-8
1.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6.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
8.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나눌 제목은 ‘우리는 누구?’입니다.

 한 여학생과 그 어머니가 찾아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내용은 여학생이 데이트 어플을 통해 남자 친구를 만나서 몇 주간 사귀었는데 현재 그 친구가 연락을 두절하고 만나주지 않아서 힘들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뇌병변으로 또래보다 정신연령이 낮습니다. 1년 전에도 같은 문제로 저랑 상담을 통해 회복되었는데 1년 만에 다시 같은 문제로 찾아 온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원하면 그 친구의 연락처를 지우고 또한 데이트 어플을 지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 그럴 마음이나 의지가 없어 보이기에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이가 아프면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서워한다. 치료 받을 때 통증 때문에... 병이 나서 아프면 병원에 가서 주사도 맡는다. 그런데 주사 맡는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왜? 아프니까. 하지만 진짜 아픈 이나 병을 치료하려면 잠시의 통증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서워서 치료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고통을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금 데이트 어플을 지우지 않고 그 친구의 연락처를 지우지 않으면 계속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거야..”

상담을 마치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여학생이 자신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는 문제를 끊지 못하듯 우리도 영원한 고통을 주는 죄의 문제를 끊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요.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늘 우상 숭배의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를 끊지 못하고 결국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어지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도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우상숭배하고 하나님께 범죄하는 기록들을 보며 그 백성이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과 비교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그 비교의식을 내려놔야 합니다. 남이 가진 것 때문에 배 아파하는 마음, 그래서 나보다 잘났거나, 나보다 많이 가졌거나, 나보다 잘되거나 하는 것을 시기하게 되어져서 비방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땅에 것이 아닌 하늘에 것을 바라보아야합니다.
C.S.루이스가 “땅을 추구하라.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늘을 추구하라. 땅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물질에 대해 너무 마음을 쏟기에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처럼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천국에 가냐 못가냐를 논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문제에 하등에 관계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에 대해서도 많은 오해를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일’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에게 주어진 저주라는 생각을 버리질 못합니다.

 지난 주일예배 설교 때 ‘성 프란시스’가 말한 이야기를 성도님들과 나누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성직자가 타락하는 세 가지 이유’에 대해 말하였는데, 저는 성직을 감당하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성도들도 오늘날에는 해당된다고 생각되어 나눕니다.

“첫째 기도하지 않아서, 둘째 책을 읽지 않아서, 셋째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서”라고 타락하는 이유를 말하였습니다. 프란시스는 수도사이자 수도운동을 하였기에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에 대해 여러 오해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QT 나눔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해서 하나님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간혹 설교집이나 해설서나 글에서도 같은 관점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접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민되어 죽을 지경으로 간절히 기도하신 이유는 결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음을 두려워 하셨다면 스데반 집사나, 순교자들보다 못나신 분이되십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면서 하신 내용과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와 질고를 대신 지신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어지기에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 되어지는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셨기에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되어지기에 우리처럼 완전한 인간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고통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과 분리되어진적 없습니다. 인간으로 오셨지만 우리처럼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신 분이 아닙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양의 머리에 안수하여 민족의 죄를 전가하여 속죄 양으로 사람들의 멸시 천대와 돌에 맞아 광야에 버려지는 것처럼 우리의 죄로 인해 속죄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버립 받는 다는 것에 고민되어 죽을 지경이 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잠시 떨어짐을 그렇게 힘들어 하셨는데 우리도 하나님과 떨어지는 것에 힘들어 해야 합니다.
그 떨어짐이 인류의 고통이었는데, 그 고통을 짊어지셨는데, 그래서 우리를 다시금 하나님과 회복시키셨는데, 다시는 우리가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부름을 받은 자이기에 두려워하지 말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

우리는 누구 입니까?
하나님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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