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예배 3기 (온라인 줌 예배) - 인식 (2021.10.30 - 총배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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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울 작성일 21-11-03 14:52 조회 801 댓글 0본문
말씀: 마태복음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감리씨가 공진이 나를 살렸어. 그래서 다시 돌아온거야. 죽지는 못했는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도 모르겠어서 불도 안들어오는 빈집에 나를 가뒀는데...
사람들이 자꾸 문을 두드려.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그저 나한테 뭘 먹여 날 들여다봐 꼭 혼자있는 길고양이 돌보듯이 무심하고 따뜻하게..”
얼마전 종영한 드라마 ‘겟마을 차차차’에 나온 주인공 홍두식(김선호)의 대사입니다. 허구지만 진짜 마을 같은 공진, 이 드라마를 통해 공동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린 이미 공진 마을보다 더 좋은 기도 공동체가 있음을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고, 감당할 수 없이 힘든 일을 겪으면 살기보다 죽으려는 마음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도 그랬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는 것이 두려웠고 삶에서 도피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삶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했습니다.
철저히 자신에게 질문을 하며 모든 학문을 샅샅이 뒤져서 문제의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왜 나는 살아가는 것인가? 왜 나는 어떤 것을 원하거나 행하는 것인가?” 문제의 답을 추론하고자 실험 학문과 추상 학문에서 해답을 구하였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현인들을 통해 그 답을 얻고자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솔로몬, 석가모니의 삶의 의문들에 대해 제시한 답은 도리어 그 절망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었습니다.
학문과 지식 속에서 의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을 접근하는 네 가지 방법을 발견합니다.
첫 번째는 ‘무지’ 두 번째는 ‘쾌락주의’ 세 번째는 ‘힘’으로 해결, 네 번째는 ‘약함’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아무리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에 대한 그 어떤 깨달음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도출하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이성적 판단으로 자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또 다른 힘이 작동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삶에 대한 의식”이라고 부른다.
대중 즉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류 전체는 삶의 의미는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은
자신이 거부할 수 없었던 그것, 즉 신앙이었다고 합니다.
신앙은 그에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었지만,
톨스토이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인간이 살아가려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믿어야 하기에 신앙은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종교인들과 신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신앙을 관찰하였는데 찾던 신앙이 아닌 삶을 즐기게 해줄 위안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고
오히려 노동자 계층의 속한 신자들의 삶과 신앙의 일치가 그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살아갈 이유를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동안 신앙을 배척하고 무의미하게 여겼던 오류는 자신의 생각이 잘 못 되었던 것이 아닌 오히려 삶이 잘 못 되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 없이는,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 없이는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인 베드로의 고백과 톨스토이의 고백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베드로는 유대교 신앙 안에서 경험하고 배운대로 고백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다윗의 왕국을 회복시켜주시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님과 동행 하였지만 예수님의 대한 인식은 정확하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니 그의 고백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기보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하는 믿음, 즉 자신의 영광 만을 생각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신앙은 어떤가?
우리가 왜 사는지?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 나가야 하는지? 그런 고민과 고찰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므로 참신앙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살아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자 그 하나님이 톨스토이의 삶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내 삶에서 내가 원하는 믿음만 가지고서 나에게 좋은 것만 이루어지는 것이 응답이라고 하나님앞에 나아간다면 하나님을 인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종교 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신이 존재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인식하는 그 순간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안에 충만해 집니다.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신앙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와 모든 말들은 신앙적 고백이 되어질 것 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헛되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악을 행하시겠습니까?
아니죠. 그래서 그런 은혜를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의 설교의 목적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톨스토이의 고백을 통하여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을 날마다 인식하고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감리씨가 공진이 나를 살렸어. 그래서 다시 돌아온거야. 죽지는 못했는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도 모르겠어서 불도 안들어오는 빈집에 나를 가뒀는데...
사람들이 자꾸 문을 두드려.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그저 나한테 뭘 먹여 날 들여다봐 꼭 혼자있는 길고양이 돌보듯이 무심하고 따뜻하게..”
얼마전 종영한 드라마 ‘겟마을 차차차’에 나온 주인공 홍두식(김선호)의 대사입니다. 허구지만 진짜 마을 같은 공진, 이 드라마를 통해 공동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린 이미 공진 마을보다 더 좋은 기도 공동체가 있음을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고, 감당할 수 없이 힘든 일을 겪으면 살기보다 죽으려는 마음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도 그랬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는 것이 두려웠고 삶에서 도피하고자 했지만 여전히 삶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했습니다.
철저히 자신에게 질문을 하며 모든 학문을 샅샅이 뒤져서 문제의 해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왜 나는 살아가는 것인가? 왜 나는 어떤 것을 원하거나 행하는 것인가?” 문제의 답을 추론하고자 실험 학문과 추상 학문에서 해답을 구하였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현인들을 통해 그 답을 얻고자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솔로몬, 석가모니의 삶의 의문들에 대해 제시한 답은 도리어 그 절망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었습니다.
학문과 지식 속에서 의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을 접근하는 네 가지 방법을 발견합니다.
첫 번째는 ‘무지’ 두 번째는 ‘쾌락주의’ 세 번째는 ‘힘’으로 해결, 네 번째는 ‘약함’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아무리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에 대한 그 어떤 깨달음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도출하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이성적 판단으로 자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또 다른 힘이 작동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삶에 대한 의식”이라고 부른다.
대중 즉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류 전체는 삶의 의미는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은
자신이 거부할 수 없었던 그것, 즉 신앙이었다고 합니다.
신앙은 그에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었지만,
톨스토이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인간이 살아가려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믿어야 하기에 신앙은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종교인들과 신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신앙을 관찰하였는데 찾던 신앙이 아닌 삶을 즐기게 해줄 위안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고
오히려 노동자 계층의 속한 신자들의 삶과 신앙의 일치가 그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살아갈 이유를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동안 신앙을 배척하고 무의미하게 여겼던 오류는 자신의 생각이 잘 못 되었던 것이 아닌 오히려 삶이 잘 못 되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 없이는,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 없이는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인 베드로의 고백과 톨스토이의 고백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베드로는 유대교 신앙 안에서 경험하고 배운대로 고백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다윗의 왕국을 회복시켜주시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님과 동행 하였지만 예수님의 대한 인식은 정확하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니 그의 고백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기보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하는 믿음, 즉 자신의 영광 만을 생각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신앙은 어떤가?
우리가 왜 사는지?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 나가야 하는지? 그런 고민과 고찰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므로 참신앙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살아내고 있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자 그 하나님이 톨스토이의 삶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내 삶에서 내가 원하는 믿음만 가지고서 나에게 좋은 것만 이루어지는 것이 응답이라고 하나님앞에 나아간다면 하나님을 인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종교 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신이 존재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인식하는 그 순간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안에 충만해 집니다.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신앙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와 모든 말들은 신앙적 고백이 되어질 것 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헛되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악을 행하시겠습니까?
아니죠. 그래서 그런 은혜를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의 설교의 목적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톨스토이의 고백을 통하여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은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을 날마다 인식하고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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